곽영빈 외 지음
미디어버스 / 180 X 240 mm / 136 쪽
2016년 6월 20일 / 값 12,000원
ISBN 978-89-94027-55-5 03680

오늘날의 많은 영상에는 서사와 무관하거나 지속적인 몰입을 요구하지 않는 “사소한”이미지들이 넘쳐난다. 통상 이러한 이미지들은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비주얼, 또는 “텔레비주얼(televisual)”로 치부되어 진지한 비평적 담론에서는 경멸적으로만 언급될 뿐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샹탈 아케르망의 설치작품 ‹지금(NOW)›과 유작 ‹노 홈 무비›를 가로지르는 이스라엘 사막의 이미지, 혹은 장뤽 고다르의 ‹언어와의 작별›에 넘쳐 나는 전쟁 숏 등을.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서사화되지 않는 이미지들이다. 그런가 하면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는 영화적 몰입을 요하지 않는 이미지만으로 만들어 낸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러한 “볼 것 없는”이미지, 혹은 서사화를 거부하는 이미지 들은 우리로 하여금 본다는 행위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런데 이처럼 먼지처럼 미세한 이미지들은 역설적으로 가장 잘 보아야만 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들에 대한 담론은 동어반복적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미지를 봐야 하는 까닭은 이미지가 의미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 이유를 갖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영상 제작자는 그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혹은 우연히 작품 안으로 기입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담론의 층위에서 제작자와 동일한 말을 반복한다는 것은 무능의 증거다. 담론의 층위에서 저 볼 것 없는 먼지 같은 이미지들은 설명 불가능함을 감수하고라도 설명되어야 한다. 설명 불가능함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 불가능함이 무엇인지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볼 것 없는 이미지들은 자족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늘 볼 것 많은, 서사적인, 먼지가 아니라 기념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미지와 결부되어 존재한다. 따라서 볼 것 없는 이미지를 보려는 시도는 필경 볼 것 많은 “기념비적인 이미지”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봐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호 특집 제목을 “이미지, 먼지와 기념비 사이에서”로 잡았다. 먼지와 기념비라는 대립항 속에서 오늘날 확산되어 있는 비-서사화 된 이미지를 보려는 방식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첫 번째 포문을 곽영빈의 「먼지와 기념비 사이의 ‘콘텐츠’ 오디오비주얼 이미지의 진동」으로 열었다. 그의 글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강정석의 작품까지 우리 시대의 영상문화 속에 잠입해 있는 비-서사화된 이미지를 넓은 스펙트럼으로 조망한다. 조지훈의 「이미지의 영도를 개념화하기: ‹보이지 않는 가족›전의 영상들에 대한 고찰」은 서울시립미술관의 ‹보이지 않는 가족›전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볼 것 없는 이미지를 “이미지의 영도(零度, degree zero)”로 개념화하고자 한다. 이한범의 「자기파괴(selfdestruction) 로부터: 행위-영상의 수행적 매개」는 미술관에 걸려 있는 영상들에 주목한다. 특히 문세린의 작품 ‹모니터 요원›과 함정식의 ‹삽›을 분석하면서, 이러한 의미망에서 빠져나가려는 영상들이 의미화를 회피하려는 시도라기보다, 영상에서 보이는 모습과 실제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분열적 상황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평가한다.

이번 『오큘로』에서는 또 하나의 특집으로 6월에 방한하는 페드로 코스타를 기념하는 자리를 갖기로 했다. 김보년의 「맨눈으로 세계를 지각할 수 있을까: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과 ‹행진하는 청춘›을 중심으로」는 솔직한 어조로 페드로 코스타 영화 보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은 그의 영화가 서사를 비껴 나가면서도 영상미를 추구하지 않는 이미지들을 삽입하면서 발생하는 이중의 난제에서 온다고 진단한다. 2010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있었던 페드로 코스타 마스터클래스 강연 전문은 그의 작품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준다. 물론 6년 전에 울려오던 그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어서 유운성의 「지하로부터의 수기: 페드로 코스타의 ‹호스 머니›」는 ‹호스 머니›에서 추락과 하강의 모티브가 누군가를 찾기 위해 하계로 내려가는 오르페우스를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와 저항을 모색하고 있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 호에는 리뷰와 인터뷰가 각각 한 편씩 실린다. 강덕구의 「지옥에서 돌아온: 김웅용의 영상 작업에 대하여」는 정치적 맥락이 사상된 고전영화들을 불러들여 영상과 사운드의 간극을 만들어 내는 김웅용의 작업에 대해서 고찰한다. 「질감들: 오민욱 × 백종관 대담」은 두 작가의 작업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인터뷰다. 마지막으로 이번 호에서부터 김태용과 박솔뫼의 서신 교환이 시작된다(「아다치 미치오를 사이에 둔 편지」). 두 작가가 아다치 마사오의 작품 세계를 주제로 한 달여간 서신 교환이라는 형태로 내용을 전개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를 시도한다.

소소한 주목 속에서 『오큘로』를 창간하고 이제 다음 호를 선보이게 되었다. 첫 호가 다소간의 흥분으로 시작되었다면, 이번 호는 많은 고민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러한 고민들이 우리를 힘들게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만 리 길에 접어듦을 기뻐하며 천천히 나아가고자 한다. (조지훈)

목차

특집 1: 이미지, 먼지와 기념비 사이에서

먼지와 기념비 사이의 ‘콘텐츠’: 오디오비주얼 이미지의 진동 ..... 곽영빈
이미지의 영도를 개념화하기: ‹보이지 않는 가족›전의 영상들에 대한 고찰 ..... 조지훈
자기파괴(self-destruction)로부터: 행위-영상의 수행적 매개 ..... 이한범

특집 2: 페드로 코스타

맨눈으로 세계를 지각할 수 있을까: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과 ‹행진하는 청춘›을 중심으로 ..... 김보년
모든 것이 달라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 ..... 페드로 코스타
지하로부터의 수기: 페드로 코스타의 ‹호스 머니› ..... 유운성

Interview

질감들: 오민욱 × 백종관 대담 ..... 진행: 정민구, 이한범, 박이현

Critic

지옥에서 돌아온: 김웅용의 영상 작업에 대하여 ..... 강덕구

Correspondence

아다치 마사오를 사이에 둔 편지 ..... 김태용, 박솔뫼

책 속에서

“‘작품’의 위상이 이렇듯 자신을 붙들어 주던 전통적인 개념적 정의의 경첩들로부터 느슨하게 풀려나는(unhinged) 과정은, 영화와 미술과 미디어 연구라는 개별 분과학문들을 가로지르는 거시적 흐름 속에서 ‘콘텐츠’라는 단어가 갖는 문제적 위상을 보다 명확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이 유용한 개념이라는 게 아니라 전통적 분과학문의 경계와 연동했던 매체의 특정성들(medium specificities)이 점차 탈각되는 과정에서 일종의 거대한 블랙홀, 혹은 ‘쓰레기 하치장’과 같은 위상을 부여받고 부상한 것이 바로 ‘콘텐츠’라는 것이다. 이경규의 ‘눕방’과 ‘낚방’영상은 강정석 작품의 배다른 짝패로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동하지만, 그들은 전통적으로 텔레비전이나 영화, 혹은 갤러리 공간에서 상영되는 싱글채널 비디오라는 매체적/비평적 특정성의 칸막이에 더 이상 가둬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잠정적이고 임시적인 ‘콘텐츠’의 세계에서, 이 둘은 자신의 반대극에 서 있는 “기념비적인 것”에 대한 도약의 욕망을 드러내고 (이경규의 경우가 웅변하듯) 때론 성취하기도 하지만, 그 둘은 자신들이 ‘콘텐츠’의 평면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며, ‘폐허(ruin)’로서의 영상 텍스트를 이루는 양 축으로 진동한다. 먼지와 기념비 사이에서 진동하는 수많은 ‘콘텐츠’들. 우리가 보고 듣는, 아니 둘러싸여 있는 ‘오디오비주얼 이미지’들은 바로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을 것이다.” (곽영빈, “먼지와 기념비 사이의 ‘콘텐츠’: 오디오비주얼 이미지의 진동”, 제 2호, 33~37쪽.)

“설명 불가능한 작품들을 하나로 묶어 놓고 “저자의 죽음과 의도의 부재”로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기획(혹은 비평)의 직무유기이자 작품에 대한 무지의 소치다. ‹보이지 않는 가족›전은 ‘이미지의 영도’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도의 이미지’를 전시하고 있다. 이는 관람객의 질문을 막아 버린다는 점에서 피상적인 접근법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지의 영도”라는 개념을 불러온다면 이것을 이미지화한 작품을 전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다시 개념화할 필요가 있다. 의미를 유보하는 실천으로서의 영도는 영상을 별 볼일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장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과 생각하기 어려운 너무나 당면한 과제 앞에서, 잠시 쉼표를 찍고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집회에서 희생자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 옆을 지나가는 대중들의 다양한 시선을 “구경꾼”으로 낙인찍지 않고 하나로 담아내어 보는 이를 동요시키게 하듯 말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말 그대로 집회에 대한 이미지가 하나의 방향이 아니라, 수많은 방향으로 다시 이미지화될 영도를 향하게 되는 것이다”(조지훈, “이미지의 영도를 개념화하기: ‹보이지 않는 가족›전의 영상들에 대한 고찰”, 제 2호, 46쪽.)

“앞서 당대의 기술, 환경적 조건과 기록 방식의 조작으로 인해 행위-영상이 더 이상 나르시시즘적인 것으로 남지 않고 자기 파괴적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기파괴는 프레임 내에서의 삶의 구성과 삶으로의 지시가 불가능하게 되고, 이미지가 무한히 유포, 저장되어 도처에 존재하게 된 상황에 따른 수동적 결과이이지만, 오히려 그 상황을 우회적인 방식으로 저항하는 가능성을 배태한다. 즉 프레임 안의 신체, 그리고 신체를 담은 프레임의 이중구조는 징후임과 동시에 이를 마주하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정치다. 스스로를 화면 안에 통제하면서도 삶의 감각을 생성하기 위해 표면을 뚫고 나오려는 시도는 이중적인 태도로 비치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존재로의 회귀로 읽힌다.” (이한범, “자기파괴(self-destruction)로부터: 행위-영상의 수행적 매개”, 제 2호, 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