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강덕구, 박이현, 이한범, 정민구
글: 강덕구 외 13명
발행일: 2016년 11월 17일
크기: 180 x 240 mm
페이지: 128
디자인: 홍은주, 김형재, 유연주
ISBN: 978-89-94027-62-3 03680
책구입: 더 북 소사이어티, 교보문고, 알라딘

책 소개
영화와 미술의 영역을 가로지르며 영상예술의 새로운 비평적 지형을 탐구하고자 하는 영상비평지 《오큘로(OKULO)》의 3호가 발간되었다. 이번 호의 특집은 ‘시간 없는 시간들’이다. 시간은 당대의 세계를 파악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이다. 《오큘로》 3호에서는 예술의 범주뿐만 아니라 게임, 인터넷방송 등 광범위한 시각문화 영역에서 감지할 수 있는 시간성을 교차적으로 탐구한다.
-----
동시대(성)에 관한 최근의 논쟁들이 보여 준 것처럼, 오늘날 시간(성)은 퍽 난처한 개념이 된 것처럼 보인다. 최근 몇 년간 출간된 책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러한 시간과 마주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유토피아적 역사를 상실한 ‘미래 이후’라는 시간에서부터, 일과 여가, 생산과소비의 구분이 완전히 소멸한 소비자본주의의 ‘24/7’의 시간, 또는 최근 급속한 기술 매체의 발달로 인한 ‘현재의 충격’에 이르기까지. 그에 따르면, 우리는 미래를 상실한 채 영원한 현재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시간은 끊임없는 승리를 장담하며 미래로 나아간다. 이 구조적 혁명은 대학을 기업화하고, 대중과 후원자의 요구에 따라 예술을 움직이게 하는 등 창조 산업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것을 문화로 만든다. 일찍이 알렉산더 클루게와 오스카 넥트는 이를 자본주의적 문화혁명이라고 부른 바 있다. 이 또한 창조 경제를 살아가는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시간일 것이다.

영화-영상은 대표적인 시간 기반 매체(time based media)이다. 그것은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또한 현실의 시간을 구성하기도 한다. 과거 많은 작가와 감독들은 주어진 시간에서 해방되기 위해 다양한 영화적 실천을 수행했다. 멀리는 여러 영화관을 수시로 오가며 영화를 자체적으로 편집하면서 관람하던 초현실주의자들과 그들이 만든 영화를, 좀 더 가까이로는 앤디 워홀의 지속이 두드러지는, 움직임이 거의 없는 영화(motionless pictures)를 떠올려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후 포스트 포디즘이 일과 여가의 구분을 점차 지워 버림으로써, 이미 해방되었거나, 영원히 지속되는 시간이 열렸다. 혹은 히토 슈타이얼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늘날 영화-영상이 거주하는 미술관은 사회적 공장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그에 기반한 매체는 어떠한 영향을 받고, 다시 어떻게 시간을 변형시킬까.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시간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오큘로》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스벤 뤼티켄에 따르면, 오늘날 문화화된 경제에서 시간과 역사의 관계를 사유하는 데 시간 테크놀로지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변형하는 시간」에서 그는 무빙 이미지가 미술관으로 이주하는 과정을 돌아보며, 포스트 시네마적 상황에서 새로운 해방의 장소를 모색한다. 이는 오늘날 영상과 시간의 관계를 사고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이어지는 두 글은 영화에서 출발해 동시대 하위문화로 그 시선을 넓힌다. 강덕구는 아프리카 TV와 같은 실시간 방송에서 과거 영화의 급진적 실천이 퇴행적인 민낯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권택경은 최근 영화에도 도입된 비디오 게임의 루프물을 분석하며 좀비화된 신체가 탄생하는 과정을 그려 낸다.

전시 공간도 시간에 기반한 매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전시장은 유독 시간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규범적인 전시 시간(과 기간)을 반대로 뒤집어 버리는가 하면, 언젠가는 한여름의 시간을 단무지처럼 반으로 쪼개 버리기도 했다. 현시원의 「모든, 첫 번째 시간」은 앨리스와 함께 하는 시간 탐험으로, 전시장에서 경험한 시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특집의 마지막은 장지한의 「역사의 성좌를 향하여」가 장식한다. 그는 양혜규 작가론을 통해 오늘날 난관에 처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예술의 대응을 모색한다.

이번 호의 ‘인터뷰’에서는 오민 작가와 방혜진 평론가의 대담을 소개한다. 작가는 올해 7월에 있었던 전시 ‹Moving / Image›(기획 김해주)의 일환으로 ‹ABA Performance›를 선보였다. 대담은 공연 후 가졌던 아티스트 토크가 지면을 위해 확장된 것으로, 작가의 전반적인 작업 세계와 그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리뷰’에서는 세 편의 글을 선보인다. 이정빈은 박경근 작가의 신작 ‹군대: 60만의 초상›을, 김보년은 연상호 감독의 신작 ‹부산행›과 ‹서울역›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2013년에 출간된 데이비드 조슬릿의 『예술 이후(After Art)』에 대한 문혜진의 리뷰를 수록한다. 끝으로, ‘서신 교환’에서 김태용과 박솔뫼는 2호에 이어 못다 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번에도 그들 사이에는 아다치 마사오가 있다.

《오큘로》의 시간에도 얼마간 변화가 있었다. 편집부는 현재 변화의 과정에 있다. 이번 호부터는 다소 축소된 인원이 오큘로를 꾸려 나간다. 시간에 관해 생각하는 자리이다 보니, 자연스레 잡지의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3개월여의 시간을 편집부가 따로 또 같이 겪으면서 하나씩 숫자를 더해 나간다는 점에서, 주기가 정해진 잡지의 시간은 고전적인 시간관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2호에서 조지훈은 《오큘로》가 ‘만리길에 접어’들었음을 이야기했다.

약 6개월 전 출판 등록을 위한 잡지명을 고민하고 있을 때, 발행인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오큘로: 01’이라고 하면 꼭 99호까지만 나올 것처럼 보이는데, ‘오큘로: 001’로 하면 어떨까요. 네, 좋아요. 숫자를 셈해 본다. 99 이상의 세 자리 숫자는 최소 100, 최대 999다. 《오큘로》는 ‘계간’ 영상전문 비평지다. 전자는 25년, 후자는 약 250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때도 이미지는 움직이고 있을까. 우리는 ‘오큘로: 004’를 준비하고 있다. (정민구)

목차

특집: 시간 없는 시간들
변형하는 시간 ..... 스벤 뤼티켄, 이한범 옮김
아프리카 TV의 지속 시간: 리얼의 무대화 ..... 강덕구
게임 오버와 서사 ..... 권택경
모든, 첫 번째 시간 ..... 현시원
역사의 성좌를 향하여: 양혜규의 블라인드 작업에 관한 노트 ..... 장지한

Interview
A / B: 오민 × 방혜진 대담

Review
검색 엔진의 시대와 이미지의 새로운 위상: 데이비드 조슬릿의 『예술 이후』 ..... 문혜진
좀비를 자세히 보고 싶어 가까이 다가갔더니 그만 죽어 버린 건에 대하여 ..... 김보년
아쿠아리움과 잠수사의 시선 ..... 이정빈

Correspondence
아다치 마사오를 사이에 둔 편지 (2) ..... 김태용, 박솔뫼



책 속에서

“실제 이미지를 없애고, 소리의 숲속에 놓인 관객의 상상에 집중함으로써 롤러의 작업은 영화가 어디에나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것이 되었음을 알렸다. 그의 작업은 필름을 상영하는 것이 문화적인 제의로 여겨지던 약 20여 년간의 시네필 시대 막바지에 위치한 것이었다. 블룸처럼, 롤러가 영화에 개입하던 시기는 내가 ‘영화적인 것(cinematic)’이라고 일컫는 것이 전통적인 영화의 환경에서 점점 분리되는 때였다. 1980년대가 도래하고 홈 비디오가 급속도로 일반화되면서 영화가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은 더 빈번해졌으며, 이는 새로운 영화적 예술(cinematic art)의 시대에 그 정점을 맞이했다. 장뤽 고다르에게 영화라는 용어는 단순히 매체가 아니라 이제는 잃어버려 돌이킬 수 없는 사회 시스템 전체를 의미했다. 만약 영화가 필름 생산과 분배에 관한 특정한 체계라면, 영화적인 것은 비유로나 주된 내용에서 문화적으로 연결된 체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화적인 것은 물적 지지체로서의 필름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필름이라는 매체, 장치들, 그리고 생산체계와 결별한다는 점에서 포스트-시네마(post-cinematic)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여전히 영화의 역사에 속해 있다. 즉 필름의 이후로서의 포스트-시네마인 것이다. 작품에서 프레임으로, 에르곤(ergon)에서 파레르곤(parergon)으로. 즉 의미가 발생하고 사회적 상황들이 생산되는 생산 장소로서의 영화로 이동하는 것이다.”
(스벤 뤼티켄, “변형하는 시간”, 《오큘로》 003호, 10~11쪽)

“현대 영화의 서사는 가장 미세한 층위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이야기다. 이에 반해 아프리카 TV의 채팅창은 여러 사건을 만들어 내도록 유도하지만, 이는 단일한 서사가 아니라 수많은 입이 내뱉는 수다의 집합일 뿐이다. 이야기는 성립되지 못하고 조그만 수다의 블록들이 존재한다. 아프리카 TV의 이야기는 BJ의 발화와 몸짓과 시청자의 리액션이 서로 교환되면서 발생하는 어떤 상태에 가까우며 이 상태를 초래하는 것은 리얼리티 스펙터클로서의 지속이다. 이제 인터넷 방송의 채팅창은 “하층 계급이나 모험을 좇는 소수의 젊은이들이 자주 드나들던 몇몇 작고 더러운 영화관”의 지위를 차지한다. 인터넷 방송의 생중계 포맷과 극단적인 행위, 저화질 이미지, 그리고 지속이 ‘리얼’을 조건화한다. 즉 ‘리얼’을 무대화하기 위한 제도적 공간이 마련되며 이는 앞서 말했던 남한의 남성 하위문화와 결속된 형태로 나타난다. 애초에 이 글에서 밝히고자 하는 바는 길고 긴 지속이 ‘리얼’함을 환기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지속에서 윤리적 가치를 찾지만 리얼을 강조하는 영상의 문법은 비윤리적이라는 역설적 상황이 눈에 띈다.”
(강덕구, “아프리카 TV의 지속 시간: 리얼의 무대화”, 《오큘로》 003호, 46쪽)

“1862년 7월 4일은 어떻게 남아 있게 된 것일까? 루이스 캐럴이 이야기를 시작한 ‘첫날’이 아니라 ‘첫 번째 날’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받아들인다. 루이스 캐럴은 7월 4일부터 ‘지속하는 시간’으로서 날마다 이야기를 이어 나갔던 것이 아니라 7월 15일, 건너뛰어 9월 10일, 어쩌면 겨울에는 뱃놀이를 사양했다가 1863년 4월이 되어서야 이야기를 시작했을 수 있다. 단절되었던 사건이 새로운 탐정을 만나 다시 형광등을 쪼이게 되어 일어나는 모양새가, ‘첫 번째’라는 표식에는 있다. 첫 번째라는 것은 두 번째와 무지막지한 시간의 갭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담할 수 없는 시간, 깨진 시간, 그러니까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다시 올지 지금은 모르는 시간. 그러나 처음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굳이 이별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막연한 언약 같은 것은 필요 없는 시간.”
(현시원, “모든, 첫 번째 시간”, 《오큘로》 003호, 54쪽)

“왜 블라인드인가? 양혜규는 자신이 블라인드에 매혹된 이유에 대해 “특정한
형태를 만들지만 그 공간을 온전히 에워싸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블라인드는 “부분적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시각 혹은 다른 감각들을 온전히 차단하지 않은 채 공간 주위로 운동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작가의 블라인드가 설치된 공간을 떠올려 보자. 블라인드를 중심으로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구획되고(동시에 해체되고) 그 사이사이를 빛과 향, 또는 소리가 안과 밖을 넘나든다. 이렇게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운동하는 다층적인 감각들은 마찬가지로 내부와 외부를 넘나드는 관객의 몸(혹은 시각)을 통해 지각된다. 다시 말해 작가가 블라인드를 선택한 건 ‘일상적인’ 사물의 물질성 때문이라기보다 그것이 구축해 내는 구조, 그리고 그 결과 구성되는 공간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이 형식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모더니즘의 예술가들 역시 이러한 양가적인 형식에 매혹되었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드다.”
(장지한, “역사의 성좌를 향하여: 양혜규의 블라인드 작업에 관한 노트”, 《오큘로》 003호, 65~66쪽)


“좀비 영화는 좀비를 최대한 자세하게 보여 주려 하지만 등장인물은 그때마다 죽음의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즉 좀비 영화에서는 좀비를 (더 잘) 보려는 욕망과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야기의 동력이 팽팽한 긴장 관계에 놓인다. 따라서 좀비물을 만드는 창작자는 좀비와 관객, 좀비와 등장인물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설정해야 한다. 그 거리가 너무 멀면 좀비 장르의 재미가 감소하고, 너무 가까우면 이야기를 끌고 나갈 등장인물들이 너무 쉽게 죽을 위기에 빠져 버린다. 이때 어떤 영화들은 좀비를 구덩이에 떨어트리고, 줄에 묶고, 그의 두 다리를 자르고, 눈을 멀게 만든다. 이때 철조망과 같은 장애물을 이용하기도 한다. 등장인물이 좀비에게 안전히 접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좀비를 더 가깝게, 더 길게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건을 얼마나 독창적이고 그럴듯하게 고안하는지가 좀비 영화의 장르적 재미를 결정한다. ‹부산행›과 ‹서울역›은 이 문제 앞에서 가장 쉽고 단순한 방법(하지만 의외로 다른 영화들이 그리 많이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을 이용한다.”
(김보년, “좀비를 자세히 보고 싶어 가까이 다가갔더니 그만 죽어 버린 건에 대하여”, 《오큘로》 003호, 1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