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그곳에서 그때: 김범과 정서영의 글과 드로잉




발행: 미디어버스
지은이: 장지한
발행일: 2021년 12월 16일
크기 120 x190mm
페이지: 213
디자인: 조현열
편집: 신은주
ISBN 979-11-90434-22-5 (93600)
값 20,000원


책을 내면서

장지한의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 김범과 정서영의 글과 드로잉》은 서울시립미술관과 SeMA-하나 평론상의 수상자가 동반자가 되어 만들어가는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간되었다.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는 비평의 몫에 대한 공공 미술기관의 책임감과 평론가들의 생명력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로, 평론가가 가지고 있는 비평적 문제의식을 장기적 연구로 분배하고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획이다.

2019년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자인 장지한은 본격적 연구에 돌입하기에 앞서, 2020년부터 미술관과 약 6개월간 사전 연구 활동을 수행했고, 이를 기반으로 2년간 자신만의 담론적 독자성을 획득하기 위한 고구를 지속해 왔다. 2021년 출간된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 김범과 정서영의 글과 드로잉》에는 그 노고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책에는 연구자가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한국 현대미술의 현장, 담론의 특이성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는 김범과 정서영의 글과 드로잉을 한자리에 모은 책이다. 그간 김범과 정서영의 작품은 정신성에 기반한 수직적인 위계를 해체하고 가벼움과 냉소를 향하고자 하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던 맥락에서 읽혀왔다. 갖가지 ‘물질’이 쏟아지던 새로운 세계는 누군가의 얼굴이 아니라 차가운 ‘사물’을 필요로 했고, 집단과 집단 사이의 좁은 틈에서 등장한 ‘개인’은 웅장한 서사가 아니라 산뜻한 ‘개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두 작가의 작품은 ‘사물’을 ‘개념적인’ 방식으로 활용함으로써 가볍지만 날카로운 ‘농담’을 던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동시대’의 지배적인 담론과 작가들의 사유를 구분해 보려 시도한다. 이는 ‘시대의 요구’가 아니라 ‘작가의 질문’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두 작가에게 사유된 것은 무엇인가. 저자가 최근 미술계에서 전례 없이 ‘유행’한 ‘유령’이라는 현상에 주목한 것도 두 작가가 갖고 있는 질문의 심연을 들여다보려는 시도였다. ‘유령’은 가끔 세계의 모호한 감각 전부를 아우를 수 있는 말처럼 보이기도, 무엇보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범과 정서영에게 유령은 반대로 자신의 바깥을 향하는 통로였으며, 유령은 내면이 아니라 ‘타자’를 향하는 ‘외존(外存)’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작품이라는 장소에서 흔히 ‘유령’ 이라고도 불리는,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의 목소리와 ‘관계’ 맺는다. 그렇기에 작품에서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제3의 무엇이며 그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 은 시대를 대변하는 기호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그곳’에서 ‘그때’ 잠시 머물기에 적절한 장소다.

한편, 이 책의 구성은 김범과 정서영의 글과 이미지를 시간순으로 성실하게 따라가기보다 그들이 작업을 시작한 80년대 말부터 최근까지의 작업을 비평가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재배치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 중에는 잘 알려진 작품도 있지만, 오랫동안 작가의 작업실 한편 먼지 쌓인 박스 속에 보관되어 온 작품도 있다. 글의 경우 작품의 일부인 것도 있지만 잡지에 기고한 단상이나 학위 논문, 그리고 출간할 생각이 없던 개인적인 일기에 가까운 것들이 뒤섞여 있다. 두 작가의 작업이 30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방대한 작업 세계를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음을 생각하면, 그 복잡한 경로를 차분히 그려내는 일은 저자가 말했던 것처럼 여전히 큰 숙제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지한은 이 책을 통해 너무나 익숙해서 제대로 직면하지 않았던 작가와 작품의 조각보를 재배치해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저자는 그들의 사유를 경유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해온다. ‘동시대 이후’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 ‘동시대’의 사유를 살펴보는 일은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어쩌면, 동시대의 사유를 살펴보는 일은 더 이상 ‘무엇이 사유되지 않는가’를 스스로에게 되묻는 일일지도 모른다.


목차

006 ’미술’ 있다 … 정서영
010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 … 장지한

015유령
017 무제 … 김범
018 GHOST WILL BE BETTER … 정서영
020 유령 … 장지한
027 무제 … 김범
030 늘 공기를 바꾸고 싶다 … 정서영
033 거기엔 … 김범
038 유령 … 장지한

065그것
066 그것 … 장지한
078 다른 꽃 두 개 … 정서영
081 사자 … 김범
082 박하사탕 … 정서영
085 나무 … 김범
088 조각적인 신부 … 정서영
094 그것 … 장지한

139그곳 그때
141 무제 … 김범
144 유들유들한 덧셈 …정서영
149 늙은 어부 … 김범
150 Continuity … 정서영
154 그곳 그때 … 장지한

167제의 육화 가담 투사
168 시각적 제의(祭儀)로서의 미술창작 … 김범
180 사물에의 가담과 투사에 의한 조각 작품 제작 연구 … 정서영
196 제의 육화 가담 투사 … 장지한


책 속에서

P.8
“미술을 뒤덮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걷어내기란 무척이나 힘겨운 일이다. 그러나 그 맥락을 찾아가는 일은 엄연히 눈앞에 있는 ‘작품’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작품’은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일 테고 미술의 주인공은 그 ‘것’들이 아니라 결국 작품이 아닐까?”
(정서영, ‘’미술’ 있다’)

P.17
“이따금 한 번씩,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해치고자 하는, 육신 없는 것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육신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거절한다고 해도 그들의 대부분은 결코 돌아가지 않고 유령처럼 내 주위에 머문다. 나는 그들에게 “왜 무엇을 위해?”라고 묻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김범, ‘무제’)

P.18
“유령—사람들은 참 유령을 이렇게 저렇게 많이도 만들어왔다—, ‘Ghost will be better’ 라는 우스꽝스러운 문장—제발 나도 그처럼 괜찮아지려나? 예술 한다고 겪는 유령 같은, 그러나 피부로 느끼는 그 갈등을 말한다고 만들어낸 사진, 그리고 비닐 민속장판이 함께 모여 두런두런”
(정서영, ‘GHOST WILL BE BETTER’)

P.203
“나는 그들이 회화와 조각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그것의 존재를 그곳에서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를 말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들은 그것의 주인은 당신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김범이 내게 보내온 단 하나의 문장은 이 책의 전부를 담고 있다. 결국 그들은 이말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 고통받는다면 그것이 아름다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장지한, ‘제의 육화 가담 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