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여백에서


화원
기쿠치 노부요시 지음, 김소연 옮김
130×187.5 mm, 200쪽
인쇄 · 제책: 문성인쇄,
2025년 8월 30일 발행,
ISBN: 979-11-90434-84-3 (03600)
1만 5천여 권의 표지를 디자인한 기쿠치 노부요시가 책을, 때로는 책의 주변을 관찰하면서 ‘물건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의 깊은 의미’를 담아 완성한 에세이집
일본을 대표하는 북디자이너인 기쿠치 노부요시가 책에 대해, 때로는 책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며 ‘물건을 만들며 살아가는 깊은 의미’를 담아 쓴 책으로, 『‘키노하나’에서(樹の花にて)』에 이은 그의 두 번째 에세이집이다. “정보 사회는 개개인의 경험을 통해 다져진 감수성과 정보를 지양하고 개인적 체험을 두려워하는 것만 같다”는 그의 말처럼, 많은 디자인 결과물이 납작한 이미지로만 소비되거나, 혹은 일방적인 기호로만 소통되는 듯한 이 시대에 창작자의 관점이나 태도를 다시금 질문하게 한다.
어릴 적부터 사람보다 사물을 더 좋아했다. 하굣길에 나뭇가지나 낡은 쇠붙이 따위를 주워다가 돛단배나 비행기를 만들었던 기억은 있어도 친구들과 뛰놀며 웃고 울었던 추억은 없다. 그런 아이가 자라기만 해서 그런지 사람을 두려워하는 성정이 그렇게 만든 건지는 따져봐도 별수 없다. 사물 속에 살아가는 수밖에. (본문에서)
장정가의 책에 대한 감성
이 책의 일본어판 출간 과정은 2023년 9월, 기쿠치 노부요시를 다룬 히로세 나나코(広瀬奈々子)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책 종이 가위(つつんで、ひらいて)〉에 담겼다. 활자가 출력된 종이를 거침없이 자르고 붙이며 표지를 디자인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 권의 책이 완성되는’ 과정이 그의 시선을 통해 소개되었다. “책이란 내용이 중요한 것이니, 오히려 그 ‘밖’을 살리는 작업을 해왔다”라고 말하는 그는, 이 책을 통해 책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문장의 극치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한국어판을 펴내며
이 책의 한국어판은 이경수의 「조우(遭遇)가 조응(照應)이 되기까지」와 박연주의 「책의 주변에서」를 덧붙이며, ‘물건을 만들어 가며 살아가는 깊은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긴다. 본문의 마지막에 더해진 두 편의 글은 한국어판을 펴내며 새로 쓰인 것으로, 일본에서 활동했던 저자와 한국에서 이 책을 읽는 독자 간의 거리를 좁히고 책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을 포개어 보고자 함이다.
발췌
매끈한 종이에 인쇄된 정보는 모니터를 통한 광학적 정보와 비슷한 인상을 준다. 어딘지 모르게 일방적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기호의 소통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다른 이가 딱딱하다 하는 것을 부드럽다 느끼기도 하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굶주리거나 아픈 사람을 상상해 보면 된다. 정보 사회는 개개인의 경험을 통해 다져진 감수성과 정보를 지양하고 개인적 체험을 두려워하는 것만 같다. 나는 시각과 촉각을 완전히 열고 받아들여야 하는, 책이라는 매체의 ‘ 후아이’ 를 소중히 여기고 싶다. (17쪽)
신문이나 잡지에서 마음에 남는 문장을 몇몇 오려내어 노트에 붙여 놓는데, 그 사이에 시간을 둔다. 오려낸 종이를 책상 한편에 문진으로 지질러 두는 것이다. 며칠에 걸쳐 한 번 더 읽어보고 쓰레기통과 노트로 행선지가 갈린다. 그 문진 역할을 작지만 무거운 사각형 애자가 담당하고 있다. 전기의 흐름을 절연하고 지지하는 애자가 문장에서 절연된 몇 줄의 문장을 우직하게 눌러 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51쪽)
북 디자인은 내부의 작품을 받드는 존재가 아니다. 안이 있으므로 밖이 생기고 밖을 가짐으로써 안이 산다. 안과 밖이 둥근 고리로 이어진 운동체, 그것이 책이다. 종이를 만드는 사람, 인쇄하는 사람, 제본하는 사람, 유통에 종사하는 사람, 서점에서매대와 서가에 진열하는 사람, 지면으로 소개하는 사람, 평론하는 사람, 각자의 생각이 운동을 가속한다. 북 디자인은 다양한 마음이 교차하는 무대이자, 다가올 독자를 맞이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92쪽)
우리는 인쇄된 글자와 그림의 의미만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인쇄 방식이나 잉크, 종이에 따라 표정이 변화하는 종이 위 오브제로서 글자와 그림을 감지하기도 한다. 동화 속 사슴이 들판에 버려진 손수건에 오감을 집중하여 확인하듯이 말이다. 인쇄된 글자와 그림을 읽는다는 것은 세계를 인식하는 표본과도 같다. 시각이 포착한 의미가 다른 감각이 포착한 인상과 포개진다. 그리하여 단어의 의미가 자라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깃들게 된다. (98–99쪽)
수업 막바지까지 아무 움직임이 없던 C군. 무엇을 물어봐도 모르겠다고만 한다. 겨우 말로 표현한 즐거움은 ‘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 인데 어떤 이야기인지 물어보면 또 모르겠단다.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 모르는 이야기’ 라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라고도 한다. ‘ 산다’ 라는 글자를 말도 안 되는 글씨로 써보면 어떨까, 하고 조언했더니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 ○나 ×도 괜찮아요?” 라고 묻는다. 내 눈을 바라보며 재차 물어본다. 그럼, 괜찮지, 고개만 끄덕였다. 모른다는 것 또한 하나의 해답이라는 것을 C군이 알려주었다. 완성된 북 디자인은 표지에 ○와 ×, △가 그려져 있고 뒤표지에는 그 퀴즈의 정답이 ‘ 산다( 生きる)’ 라는 세 글자였음을 알려 주듯 작게 적혀 있다. 허전해 보인다며 친구가 뒷면을 색칠해 주었다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한다. 완성된 작업을 바라보는데 눈시울이 붉어졌다. (114쪽)
저자 소개
기쿠치 노부요시
기쿠치 노부요시(菊地 信義, 1943–2022)는 일본 도쿄도 출신의 디자이너이다. 타마미술대학 1학년 시절 코마이 테츠로(駒井哲郎)가 디자인한 모리스 블랑쇼의 1955년 작 『문학의 공간』 표지를 보고 그 디자인에 매료되어 북 디자인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후 대학을 중퇴하고 12년간 상업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1977년 북 디자이너로서의 길을 결심한 이후 30여 년간 1만 5천여 권의 책 표지를 디자인했다.
“책이란 내용이 중요한 것이니, 오히려 그 ‘밖’을 살리는 작업을 해왔다”라고 말하는 그는 책의 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메시지를 구현한 디자인을 수행하고 책을 지어왔다. 1984년에 제22회 후지무라 기념 역정상을 수상했고, 1988년에는 제19회 고단샤 출판문화상을 받았다. 또한, 고단샤문고, 고단샤문예문고, 헤이본샤 신서, 현대시문고 등의포맷을 디자인했으며, 다른 대표작으로는 『후루이 요시키치 작품집』, 『시부사와 다쓰히코 전집』, 『신편 일본 고전문학 전집』 등이 있다. 더불어 『기쿠치 노부요시 장정의 책(菊地信義 裝幀の本)』(리브로포트, 1989년), 『북 디자인=기쿠치 노부요시의 책(裝幀=菊地信義の本)』(고단샤, 1997년), 『‘키노하나’에서(樹の花にて)』(하쿠스이샤, 1993년), 『신·장정담의(新·裝幀談義)』(하쿠스이샤, 2008년), 『기쿠치 노부요시의 북 디자인(菊地信義の装幀)』(슈에이샤, 2014년) 등을 집필했다.
이경수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안그라픽스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이후 한글과 다른 언어와의 관계에 의문을 품고 대학원에서 다국어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한 뒤, 이를 올바르게 구현하고자 안그라픽스에서 만난 동료들과 함께 2006년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워크룸을 설립하고, 현재까지 다국어 조판을 연구하며 정교한 타이포그래피를 실천하고 있다.
박연주
언어, 타이포그래피, 책과 이들에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개념인 구조, 배열, 순서에 관심을 두고 작업하는 디자이너다. 헤적프레스(Hezuk Press)를 통한 출판활동과 대학에서의 강의를 겸하고 있다.
역자 소개
김소연
서울과 도쿄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그래픽 디자이너, 출판 편집・제작자로 일했다. 현재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아카데미 번역아틀리에에서 공부하며 한일 번역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문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ZINE 『udtt book club』 구성원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