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김보년, 이도훈, 이한범
지은이: 오큘로 편집부
발행일: 2018년 10월 10일
크기: 180 x 240 mm
페이지: 148
디자인: 홍은주, 김형재
ISBN: 978-89-94027-93-7 93680
가격: 12,000원

책 소개
최근 영상 작업에서 풍경을 마주하는 일이 잦아졌고, 이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는 것이 편집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문제의식은 단순했으나 그것을 풀어내기란 실상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풍경이라는 문제가 비판에의 요구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영상 예술의 작동을 이해하기 위한 특수한 통로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우리가 다루는 영상 예술이라는 것이, 풍경의 이미지가 그러하듯 언뜻 너무도 자명해 보이지만 여전히 탐험해야 할 미지의 대상이고 끊임없이 합의가 재조정되는 복잡다단한 체계의 장소임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풍경의 이미지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이미지의 조건들을 마주할 것이다. 풍경의 이미지는 말이 없다.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며, 오디오비주얼의 체계 안에서 어떻게 수행적인지에 대해 다시 말하기 위해서 결국 필자들에게 나름의 비평적 논증을 새로이 구축하기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지독하게 무더웠던 이번 여름은 그렇게 풍경이라는 추상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며 수도 없이 막다른 벽 앞에 서기를 반복한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에게 풍경이라고 지각되는 것은 있는 그대로 놓여 있는 외부 세계의 대상처럼 보이지만 실은 “주관적 관여를 통해 매개된 것”(서동진), 즉 “그렇게 보이게끔 변환되고 구성된 것”(유운성)이다. 이와 같은 전제는 풍경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기 위한 시작점이 된다. 서동진은 동시대 영상 작가들의 작품에서 무의미한 풍경이 증가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그것이 “불투명한 세계에의 고백, 재현 불가능한 세계의 증언”일 뿐이라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 풍경은 역사적 시간으로부터 탈구된 기억의 공간이자 체험의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대립되는 것은 “재현의 위기를 돌파하는 충만한 재현”으로서의 풍경, 예를 들어 아다치 마사오가 ‹약칭: 연속사살마›를 통해 시도하고자 했던 실천이다. 서동진은 만약 아다치 마사오의 비판적 서사로서의 풍경이 오늘날 불가능하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고 묻는다. 이도훈 또한 최근의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나타나는 풍경의 과잉에 대해 지적하며 대부분의 풍경 이미지가 주제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 혹은 목적 없는 체험의 시간일 뿐임을 비판한다. 이도훈은 액티비즘 다큐멘터리에 있어 그러한 풍경이 요청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한국의 정치·사회적인 현실이 있었지만 그 시급함에 비해 풍경이 미학적으로 기능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유운성은 “흐름(風)과 보임(景)을 통해 우리에게 현전하는 모습”으로서의 풍경에 주목한다. “가시성의 교환”으로서만 드러나는 풍경이라는 것은 비가시적 대상을 드러내고자 골몰하는 영화적 에세이스트의 사유와 겹쳐진다. 그리하여 풍경은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표현하고 또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이념”이라는 특수한 대상을 다루기 위한 방법론으로서의 에세이 영화와 맞닿는다고 필자는 통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한범과 김혜림이 풍경이라는 주제 아래 바스마 알샤리프와 아보우나따라 콜렉티브 두 작가(그룹)를 선택한 것은 흥미롭게 읽힐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다루는 대상은 각각 가자지구와 시리아 내전이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한범과 김혜림은 이 작가들이 그들이 경험한 전쟁을 재난의 이미지로 재현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러나 각자의 미학적 선택은 다른 길로 갈라선다. 바스마 알샤리프가 가자지구라는 상황이 놓여있는 역사의 필연적인 힘을 영화적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풍경을 꿰어 냄으로써 가시화시키려 한다면, 아보우나따라 콜렉티브는 풍경을 거부하고 더욱 미시적인 얼굴들로 다가간다. 마지막으로 김보년은 최근 개봉한 한국의 장편 극영화를 예시 삼아, 오늘날 영화 제작의 측면에서 풍경을 어떻게 조작하는지에 집중한다. 풍경이 조작되기 쉬운 “약한 이미지”가 되었음이 오늘날의 보편적인 조건이라면, 풍경을 향한 비평의 논점은 어디에 닿아야 할 것인가?

이번 호에서는 세 편의 대화를 만날 수 있다. 첫 번째는 오늘날 영역을 막론하고 뜨거운 주제로 부상하고 있는 인류세에 관한 브뤼노 라투르와 폴린 줄리에의 대담이다. 이를 풍경의 문제와 연관시켜 보는 것도 흥미로운 독해가 될 것이다. 이 외에도 현소영이 폴린 줄리에의 전시 «박물지»에 관해 작가와 나눈 대화의 기록이 수록되어 있으며, 김정현은 구동희가 지금까지 만든 싱글 채널 영상을 모두 감상한 후 작가에게 꼼꼼한 질문을 던진다.

가끔 영상만을 다루는 『오큘로』의 특수성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하나의 매체만을 다루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종종 듣곤 한다. 어떠한 관성에 매몰되려 할 때마다 나는 『오큘로』를 창간했을 때 내세웠던 “미술과 영화를 가로지르는 비평”이라는 문구를 곱씹어 본다. 그러면 사실 지난 시간 스스로에게 절실했던 요청이 무엇이었는지 후다닥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우리에게 매체 자체는 신봉해야 할 최종의 목표가 아니며,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매체를 가로질러 당대에 발현되는 미지의 현상 혹은 다시 곱씹어 이해할 필요가 있는 문제에 대한 비평적 논의의 토대와, 어색함을 불러일으키는 동시대적 거리를 마련하는 것일 테다. 또한 논점을 제안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전력을 다해야 할 곳은 비평의 방법론일 것이며, 이를 위해 역사에 대한 이해를 끊임없이 조정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적절한 것이었고 유의미한 시간으로 축적된다면, 우리 앞에는 공동의 협상을 위한 원탁이 놓일 수 있을 것이다.
(이한범)


목차


003 이한범

특집: 풍경
010 서동진 풍경은 넘치지만 현실은 희박하다: 풍경 이미지의 정치적 퇴행
027 유운성 흐름과 보임: ‘너머’ 없는 세계의 풍경과 에세이 영화
040 이한범 역사를 위한 아토피아: ‹우로보로스›의 풍경
052 김혜림 풍경을 선택할 자유—그럴듯하지 않은 풍경을 다큐멘터리에 들여온다는 것: 아보우나따라 콜렉티브
058 김보년 풍경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틀 포레스트›와 ‹버닝›의 풍경에 대한 짧은 생각
066 이도훈 풍경이라는 독(毒):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풍경을 활용하는 방식에 대하여

Interview
080 브뤼노 라투르, 폴린 줄리에
지층과 자연: 왜 인류세(Anthropocene)인가?
090 현소영 펼쳐진, 혹은 진열된 영화: 폴린 줄리에와의 대화
132 김정현 싱글 채널 태피스트리: 구동희 작가와의 대화


책 속에서

­ “그러나 오늘날 자연적이고 실정적인 대상이라기보다는 언제나 어떤 지향과 의미에 의해 채색된 주관화된 풍경의 특징은 다른 방식으로 구실하는 듯이 보인다. 과거의 경우 풍경이란 외적 세계를 어떤 의미의 정박점으로서 바라보도록 이끌며 풍경이라는 외적 세계에 포함된 주관적인 인식과 지각의 세계를 반성하도록 요구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풍경은 그것의 무뚝뚝한 객관적 외재성을 가장하지만 그 속에는 어떤 주관성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풍경을 제작하는 이나 바라보는 이나 그것에서 의미의 해석을 촉구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있다. 당신은 그것을 보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더욱 경악스러운 점은 그것이 당신이 어떻게든 관여하고 초래한 세계라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손을 댔고 또 지금도 손을 뻗고 있는 그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렇다면 근년 우리가 마주하는 풍경이 멜랑콜리 자체로 현신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인지 모른다. 아마 압도적으로 풍경 이미지가 쇄도하였던 사태 가운데 하나였을 세월호 참사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서동진, “풍경은 넘치지만 현실은 희박하다: 풍경 이미지의 정치적 퇴행”, 《오큘로》 007호, 13쪽.)

“영화적 에세이는 가시성 이외의 어떤 속성도 없어 보이는 풍경이 실은 교환되는 것이라는 데 주목한다. 하나의 풍경은 그 자체로만 놓고 보면 자명하기 이를 데 없다. 가시성이 극도로 강화된 풍경은 여기와 저기, 그리고 과거와 현재라고 하는 교환의 토대가 되는 시간적 · 공간적 대립항들의 한쪽을 억누르면서 여기–현재, 여기–과거, 저기–현재, 저기–과거 가운데 하나에 고착된 기만적인 구성물을 산출해낸다. 영화적 에세이스트들은 이처럼 가시성으로만 환원된 것처럼 보이는 풍경 옆에 시간적 · 공간적으로 이질적인 풍경을 병치하거나 아니면 아예 풍경이 아닌 것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풍경의 가시성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님을 논증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이러저러하게 보이는 풍경이 그렇게 보이게끔 하는 비가시적 힘에 대한 사유로, 풍경의 이면이나 너머에서가 아니라 풍경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힘에 대한 사유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그러한 논증의 과정이 없는 풍경영화는 영화적 에세이와는 거리가 멀다 하겠다.”
(유운성, “흐름과 보임: ‘너머’ 없는 세계의 풍경과 에세이 영화”, 《오큘로》 007호, 34쪽.)

“영화의 마지막에는 아스팔트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나온다. 이 장면은 처음에는 만화경(kaleidoscope)의 이미지처럼 만들어져 무엇인지 알 수 없는데, 이내 지상에서 멀어지는 드론으로 촬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스팔트 위에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그림과 함께 ‘HEL’이라고 하는 글자가 그려져 있다. 이 글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지옥(Hell)일까? 안녕(Hello)일까? 아니면 도와달라는 신호(Help)일까? ‹우로보로스›는 이 미완의 단어처럼 언어적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단지 표면들의 구조로만 건설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장소는 없고 공간적 경험만이 있을 뿐이며, 역사적 서사는 없고 역사를 위한 방법만 있을 뿐이다. 알샤리프는 “재현하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곧장 알게 되는 것보다는 당신이 있는 장소에 대한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의 조건을, 내가 관여하는 역사를 어떻게 지각할 수 있는가? 영화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체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이 가능한 방식들을 점쳐보며 모델을 세워보는 모의실험에 가까울 것이다.”
(이한범, “역사를 위한 아토피아: <우로보로스>의 풍경”, 《오큘로》 007호, 44쪽. )

“다큐멘터리를 소재의 측면에서 분류할 수 있다면, 그렇게 분류된 다큐멘터리 장르는 마치 각자가 포착해야 하는 풍경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비슷한 풍경들을 찍어낸다. 내전과 전쟁 다큐멘터리는 기아와 폐허의 풍경을 내세우며, 노동 다큐멘터리는 시위의 풍경을, 환경 다큐멘터리는 기술을 통해 수집된 객관적 수치를 더한 이미지를 내세운다. 다큐멘터리가 선택한 대상의 속성에 따라 그들은 각각의 반복적인 풍경을 조직하고, 그것은 관습으로서 굳어진다…(중략)…아보우나따라는 이 공고한 작동, 혹은 진실다움의 횡포를 멈추고 개인의 위엄 있는 풍경, 피해자가 아닌 주체로서 말할 수 있는 입체적 풍경을 조직해 나간다. 그들은 거대서사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시리아에 살고있는 인물들의 생활과 신념으로부터 풍경을 포착하며 동시에 외부를 향한 소구가 아닌 집단 내부에 대한 성찰로 시선을 돌린다.”
(김혜림, “풍경을 선택할 자유—그럴듯하지 않은 풍경을 다큐멘터리에 들여온다는 것: 아보우나따라 콜렉티브”, 《오큘로》 007호, 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