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A 전시 아카이브 1988-2016: 읽기, 쓰기, 말하기


발행: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기획: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편집: 구정연, 이한범
보조: 유지원
번역: 김선주, 유지원, 아트앤라이팅
감수: 존 리어든(John Reardon)
디자인: 신신(신해옥 · 신동혁)
사진: 김상태
인쇄 · 제책: 문성인쇄

170 x 230 mm
발행일: 2016년 12월 13일
ISBN: 978899402767

《SeMA 전시 아카이브 1988-2016: 읽기 쓰기 말하기》(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16-12-13 ~ 2017-03-26) 전시 일환으로 제작된 도록입니다.

목차
진화하는 서사의 구조 만들기, 박가희
SeMA 전시 연대기
- 이정민: 너희가 팩좽을 아는냐—청년 읽기
- 현시원: 호랑이에서 서울까지, SeMA 소장품의 궤도
- 김학량: 세마잡록

읽을거리
포스트뮤지엄과 새로운 관객, 김홍희
제도비판에서 신제도주의로, 양은희
블루칩, 푸른 꽃, 또는 우울감: 서울시립미술관의 젊은 미술가들, 윤원화
관객이 많은 미술관, 안소현
제도와 미술의 역학관계: SeMA를 중심으로 본 공립미술관의 작동원리, 임근혜

『SeMA 전시 아카이브 1988-2016: 읽기 쓰기 말하기』는 서울시립미술관이 개관한 이래 현재까지 개최한 전시의 맥락에서 미술관의 역사를 다시 살펴보려는 책으로, 동명의 전시와 함께 만들어졌다. 지난 30년간의 전시 관련 각종 공문서, 도면, 사진, 영상기록 등을 발굴하여 시대에 따른 전시의 형식 및 전시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알아본다. 나아가 이를 통해 미술관의 정책과 역할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살펴본다.

이 책은 서울시립미술관이 지나온 30여년을 총 6개의 시기로 나누고 다양한 시각자료와 텍스트로 각각의 특성을 보여준다. 기획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은 ‘연대기(Chronology)’이다. 왜냐하면 연대기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서사를 제시하기 위해 가공되지 않은 역사 기록에서 사실을 선택하여 배열한 것으로, 시작과 끝이 없이 개방되어 무한히 이어질 수 있는 서술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는 연대기에서의 서술이라는 행위는 과거 사건에 관한 하나의 ‘설명’이며, 결론내지 않는 시작의 연속이기에 연대기 스스로 역사적 리얼리티를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획자는 이와 같은 연대기의 개방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현재 활발하게 활동중인 다섯 명의 작가, 비평가, 큐레이터의 목소리를 빌어 미술관의 공식적인 서사에서 공백으로 남은 곳을 다시 검토해보는 것이다.

미술작가인 윤지원과 Sasa[44]는 영상과 사진, 오브제를 통해 개입하고, 김학량, 이정민, 현시원은 각자의 내밀한 관점이 담긴 글을 썼다. 이들의 작업은 전시의 정보가 시간순으로 나열된 책 사이사이에 틈입해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책의 후반부에는 현 시립미술관 관장 김홍희를 비롯하여 안소현, 양은희, 윤원화, 임근혜의 글이 실려있다.
주제는 모두 다르지만 이들의 심도있는 글은 미술과 제도,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여러 주체들이 어떻게 작동해왔고 그것이 어떤 풍경을 그려내는지 좀 더 거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 결론은 없으며, 단지 미술관을 둘러싼 복잡한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낼 뿐이다. 그리하여 이 책 『SeMA 전시 아카이브 1988-2016: 읽기 쓰기 말하기』는 자연스럽게 역사를 판단하는 주체로 독자를 데려온다.
미술관의 역사를 점잖게 기록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역사가 끝내는 완결되지 못하는 논쟁의 장이 되는 것이다.

목차

진화하는 서사의 구조 만들기 - 박가희 7
SeMA 전시 연대기 15

읽을거리 123
포스트뮤지엄과 새로운 관객 – 김홍희 125
제도비판에서 신제도주의로 – 양은희 141
블루칩, 푸른 꽃, 또는 우울감: 서울시립미술관의 젊은 미술가들 – 윤원화 157
관객이 많은 미술관 – 안소현 169
제도와 미술의 역학관계: SeMA를 중심으로 본 공립미술관의 작동원리 – 임근혜 175

찾아보기 187


책 속에서

이 전시는 끊기고 구멍 난 미완성의 상태로 관객과 마주할것이다. 미술관의 역사를 현재의 시점에서 돌아본 서술이 온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전시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구조로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미술관이 스스로를 역사적 문맥 안에 위치시키는 것을 지양하기 위해서, 열린 형태의 연대기 구조를 통해 능동적으로 진화하는 서사를 쓸 수 있기를 바랐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으로 직조되는 미술관의 과거를 살피고, 현재를 이야기하며, 미래를 상상해보고자 한다. 즉, 이 전시는 미술관의 의의와 역할을 관성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미술관은 무엇을 위한 공간이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매우 원론적이지만 필요한 이야기를 이제 우리의 입으로 이야기해 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시의 연장선으로 출판되는 이 책 역시 ‘연대기적’ 전시의 구조와 서사를 성실히 담아내는 역할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시선과 입장에서 미술관을 이야기하는 필자들의 글을 담아 서울시립미술관이 과거, 현재, 미래에 위치한 지점과 그 지점에 따라 요구되는(또는 요구할 수 있는) 역할을 가늠할 수 있는 좌표를 제시한다.
(박가희, “진화하는 서사의 구조 만들기”, 본문 13쪽)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은 그동안 청년을 어떻게 ‘발견’해왔을까. 도록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10년까지 격년제로 이루어진 ‘SeMA 해당연도’로 표기된 전시 기획은 ‘단순하게 신진 작가들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며 동시대의 사회 문화적인 현실을 조망’하고자 했다. 스스로 표현하기에 ‘다소 늦은’ 젊은 세대에 대한 관심과 함께 동시대 미술 문화에 대한 이슈를 포함하는 ‘구체성’을 띄도록 한 것이다. 영어 표기로 ‘Selected eMerging Artists’*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탈권위의 젊은 미술관을 향한 바람은 ‘Selected’의 권위를 포기하지는 못했지만 동시대의 이슈나 동향으로 다소 치환해보려는 시도였던 것 같다. 선발 형태의 전시는 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먹는다는 말도 있듯 형식의 한계가 그렇다 한들 여기에 참여한 기획자들의 노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들은 당시의 시각에서 열심히 청년을 읽고, 동시대를 읽고자 했으며 덕분에 도록을 채운 빼곡한 언어들은 당시의 분위기를 가늠해보는 흥미로운 자료가 된다. 동시에 이는 동시대가 얼마나 동시대이기 힘든지를 모순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당시 미술관 운영주체의 취향 변화를 넘볼 수 있는 것은 덤이다.
(이정민, “너희가 팩좽을 아느냐- 청년 읽기”, 본문 46-47쪽)


문명적 변화와 진화는 활기찬 이질적 에너지들이 하나로 융합되는 역사적 전환기의 용광로 같은 현장에서 일어난다. 일례로, 르네상스 문명은 이교도와 기독교, 고대부흥과 과학혁명에 대한 열망이 교차했던 중세와 근세의 과도기적 산물로서 그러한 양면성의 갈등과 고뇌가 찬란한 인본주의 문명으로 승화된 것이었다. 우리는 오늘날 이와 유사한 현상을 변화하고 있는 뮤지엄에서 목도하게 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글로벌리즘과 로컬리즘, 신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가 교차, 공존하는 인식론적 혼란과 후유증을 경험하고 있는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세기적 전환기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뮤지엄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존 뮤지엄 규범의 실천적 계승과 새로운 뮤지엄 아이디어에 대한 양면적 요구 사이에서 “힘겨운 투쟁”을 치르며 탄생한 포스트뮤지엄이다. 뮤지엄 실천의 중심부에 관객을 놓고 그들을 가시화, 활성화시키는 진취적이고 포용적이며 미래지향적인 포스트뮤지엄은 다시 말해 시대적 요청으로 힘겹게 그러나 용기 있게 등장한 전환기적 산물이자 전지구적 미래를 예시하는 문화적 방향타라고 말할 수 있다.
(김홍희, “포스트뮤지엄과 새로운 관객”, 본문 137-138쪽)


그러니까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진 젊은이들이 2000년대 미술을 만들었고 이런 젊은이들이 계속 공급되지 않는다는 진단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젊은이들은 한국 근현대사가 매년 갱신을 요구하는 일종의 사회 계약서에서 투입 대 수익의 비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누적 수익이 최대치에 달했던 시대에 탄생한 어떤 종류의 잉여 생산물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그러한 풍요 속에서 동시대 한국 사회 전체가, 심지어 정부나 기업조차도 문화적 혁신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재확립하는 현대화 또는 ‘선진국화’에 몰두했으며, 이 과정에서 상당한 규모의 자본이 유입되어 새로운 미술 제도의 기반을 다졌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우량한 인간의 공급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덜 논의되지만 적어도 그만큼은 중요한 문제로, 2010년대에는 무조건적인 미술 우호적 자본의 공급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에서 미술은 더 이상 자본의 자기 증식적 본성을 거스르면서 우아하게 자산을 탕진하는 방법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산을 확실하게 불리고 안전하게 상속시킬 수 있는 재테크 수단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다. 미술과 자본의 관계를 철저하게 부정할 수 있다면 이 모든 변화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아무것도 아닌 변화는 미술이 별도의 자율적 영역을 구성하고 예외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여지를 축소시킨다.
(윤원화, “블루칩, 푸른 꽃, 또는 우울감: 서울시립미술관의 젊은 미술가들” 본문 162쪽)


예술가와 큐레이터가 상호 활동을 전시로 보여주며 제도를 형성하는 관계는 현대미술의 방향에 있어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미술 작업과 전시라는 매개체를 두고 협력과 긴장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작품의 맥락과 전시의 맥락을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전시가 예술의 맥락을 소개하는 주요한 현장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큐레이터의 위상이 높아졌다면, 미술관과 비엔날레는 그러한 전시를 보여주는 주요 장소로서 권력화 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화이트 큐브’에 대한 비판, 제도 비판적 개념미술의 등장, 유명 큐레이터의 혁신적 개념과 예술가의 작업의 협업화 등은 지난 수십 년간 변화된 미술계의 모습을 진단할 수 있는 몇 가지 변화이다. 특히 1990년대부터 큐레이터가 현대미술의 향방과 범위에 미치는 역할은 커지고 있다. 더불어 예술가와 큐레이터는 지난 20여 년간 과거 어느 시대보다 현대미술을 보여주는 여러 방식을 탐구하면서 밀접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다. 큐레이터는 특정 전시주제를 잡고 그 주제를 실현하기 위해 작가에게 작품을 의뢰하게 되고 작가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과정에 큐레이터의 개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견에서 보면 ‘창작’이라는 공통분모를 두고 양자가 협력과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양은희, “제도비판에서 신제도주의로”, 본문 147-1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