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s at an Exhibition an exhibition in ten chapters and five poems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배수아, 박솔뫼, 김혜순, 김금희, 김숨, 김언수, 편혜영, 마크 폰 슐레겔, 아말리에 스미스, 안드레스 솔라노, 이상우 지음
2020년 7월 8일 발행
언어: 한국어/영어
기획 및 편집: 야콥 파브리시우스
삽화: 배지민
디자인: 신신
부산비엔날레 공동발행
ISBN 979-11-90434-05-8 (93600)
148x210mm / 480페이지
값 20,000원


문학 작가들이 쓰는 부산의 이야기들
열 개의 단편 소설과 다섯 편의 시를 수록한 이 책은 2020부산비엔날레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를 위해 제작되었다. 광범위한 장르와 세대, 문체를 보여주는 열한 명의 저자들은 부산을 배경으로 탐정물, 스릴러, 공상과학, 역사물 등 다양한 형식 아래 혁명과 젠더, 음식,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부산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쓰기 위해 초대된 저자들은 도시를 둘러싸는 가상의 층­을 창조했다. 이들 중 일부는 도시를 직접적으로, 다른 일부는 간접적으로 다뤘다.

현대미술과 현대문학의 만남, 문학을 통해 보는 현대미술
2020년 부산비엔날레에 참여하는 70명 이상의 시각 예술가와 음악가들은 이 책에 수록된 글이나 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작업을 제작하거나 기존의 작품을 선택했다. 2020년 부산비엔날레 전시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는 부산을 문학과 음악, 시각 예술이라는 만화경을 통해 복합적으로 제시한다. 그 중에 전시의 뼈대나 다름없는 열한 명의 저자들이 집필한 텍스트는 각 장으로 나뉘어 도시의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김숨, 김혜순, 배수아, 마크 폰 슐레겔, 아말리에 스미스, 이상우, 편혜영의 이야기를 담은 일곱 개의 장은 부산현대미술관에 자리한다. 김금희, 박솔뫼, 안드레스 솔라노의 이야기는 부산의 원도심 지역인 중앙동에 다양한 장소들을, 마지막 장인 김언수의 이야기는 영도 항구에 있는 한 창고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시장으로 선정된 공간은 부산의 중요한 역사적 장소들로, 여기에 수록된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의 이야기와 전시는 관람객들이 부산의 탐정이 되도록, 그리고 이 도시의 다양한 지역을 탐험하고 재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목차
야콥 파브리시우스 - 서문
배수아 - 나는 하나의 노래를 가졌다
박솔뫼 - 매일 산책 연습
김혜순 - 오션 뷰 / 고니 / 자갈치 하늘 / 해운대 텍사스 퀸콩 / 피난
김금희 – 크리스마스에는
김숨 – 초록은 슬프다
김언수 – 물개여관
편혜영 – 냉장고
마크 폰 슐레겔 – 분홍빛 부산
아말리에 스미스 – 전기가 말하다
안드레스 솔라노 – 결국엔 우리 모두 호수에 던져진 돌이 되리라
이상우 – 배와 버스가 지나가고

저자 소개
김금희는 1979년 대한민국 부산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성장한 소설가이다. 단편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중편소설 『나의 사랑, 매기』 등을 출간했다. 신동엽문학상, 젊은작가상 대상, 현대문학상, 우현예술상 등을 받았다.

김언수는 1972년 대한민국 부산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장편소설 『캐비닛』, 『설계자들』, 『뜨거운 피』 와 소설집 『잽』이 있다. 작가의 작품들은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 전 세계 20개국에 번역 출간되었다. 『뜨거운 피』가 한국에서 영화로 제작되었고 『설계자들』이 할리우드에서 영화 제작 중에 있다.

김숨은 1974년 대한민국 울산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느림에 대하여」가,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각각 당선되어 등단했다. 장편소설 『철』 『노란 개를 버리러』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바느질하는 여자』 『L의 운동화』 『한 명』 『흐르는 편지』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너는 너로 살고 있니』, 소설집 『침대』 『간과 쓸개』 『국수』 『당신의 신』 『나는 염소가 처음이야』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등이 있다. 동리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김혜순은 1995년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시집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날개환상통』,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연인, 환자, 시인, 그리고 나)『, 『여성, 시하다』, 『여자짐승아시아 하기』, 시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등을 출간했으며,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문학상, 올해의 문학상,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 이형기문학상, 그리핀 시 문학상을 수상했다.

박솔뫼는 1985년 대한민국 광주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 『겨울의 눈빛』, 『사랑하는 개』를 비롯해 장편소설 『을』, 『백 행을 쓰고 싶다』, 『도시의 시간』, 『머리부터 천천히』 등을 썼다. 김승옥 문학상과 문지 문학상, 김현 문학패를 수상하였다.

배수아는 1965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난 소설가이자 번역가이다. 1993년 첫 단편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장편과 단편, 에세이 등을 발표해왔고, 2001년 베를린에 체류한 계기로 독일어를 배워 번역가로도 활동한다. W. G. 제발트, 카프카, 헤르만 헤세, 발저 로베르트, 페르난도 페소아, 클라리시 리스펙트로 등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2018년 단편집 『뱀과 물』을 출간한 이후로 자신의 작품을 직접 낭송극으로 만들어 수 차례 공연을 했다. 가장 최근 발표한 작품은 『멀리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베르너 프리치 감독의 필름 포엠 〈FAUST SONNENGESANG〉 프로젝트를 함께 하고 있으며 〈FAUST SONNENGESANG〉 3(2018)편과 4(2020)편에 낭송배우로 출현했다.

안드레스 펠리페 솔라노는 1977년 콜롬비아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나를 구해줘, 조 루이스』, 『쿠에르보 형제들』, 『네온의 묘지』를 출간했다. 또한 한국에서 6개월 간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 『최저 임금으로 살아가기』, 한국에서의 삶을 그린 논픽션 『외줄 위에서 본 한국』은 2016년 콜롬비아 도서상을 수상하였고, 2018년 『한국에 삽니다』로 번역되었다. 또한 영국 문학 잡지인 그란타의 ‘스페인권 최고의 젊은 작가’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마크 폰 슐레겔은 1967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독일 쾰른에서 거주중인 미국/아일랜드 국적의 소설가이다. 데뷔작 『베누시아(Venusia)』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상에서 SF 부문 수상 후보에 올랐다. 실험적인 공상과학, 문학 이론, 예술에 대한 글은 독립 출판계에서 지속적으로 출간된다.

아말리에 스미스는 1985년 덴마크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시각예술가이다. 2010년부터 7권의 하이브리드-소설책을 출간했으며, 대표작으로는 『Marble』을 꼽을 수 있다. 작가의 작품은 물질과 관념의 뒤얽힌 것들을 조사하며, 덴마크 섬에 있는 육식 식물, 디지털 구조로서의 직물, 인공적 삶의 선구자로서의 고대 테라코타 조각상 등과 같은 주제를 다룬다.

이상우는 1988년 대한민국 인천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프리즘』, 『warp』, 『두 사람이 걸어가』를 발표한 바 있다.

편혜영은 1972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소설집 『아오이가든』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 구애』, 『밤이 지나간다』, 장편소설 『재와 빨강』, 『서쪽 숲에 갔다』, 『선의 법칙』, 『홀』, 『죽은 자로 하여금』 등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젊은작가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셜리 잭슨상을 수상했다.

책 속에서
파도가 점점 밀려와 마침내 우리의 형체를 완전히 집어삼킨다.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단지, 나는 하나의 노래를 가졌다. 나는 하나의 춤을 가졌다. 나는 하나의 바다를 가졌다. 빛이 산산이 부숴지는 수면 위로 흰 새의 형태를 가진 목소리가 날아간다. 그날 바닷가에서, 죽기 전의 싱그러운 젊은 처녀인 친척 여자에게, 나는 입맞추었던가. 구부러진 가운데 손가락을 가졌으며, 파도처럼 부서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집을 나갔던 내 최초의 여인, 그녀는 나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대신 웃음을 멈추지 않으면서, 해변의 새들을 향해서 발길을 돌린다. 그러나 새를 보고 있는건 아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엄마. 내 입에서는 생애 최초의 말이 흘러나오지만, 나와 그녀, 둘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30페이지, 배수아, 「나는 하나의 노래를 가졌다」 가운데)

술을 마시면 잠이 들어버리는 사람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술을 마시고 잠들면 금세 잠에서 깨어버리는 사람. 바의 주인은 끝까지 점잖게 자리를 정리하고 선물로 꼬냑을 한 병 두고 갔다. 꼬냑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는 쓰레기를 손에 들고 나갔다. 나는 최선생의 거실에서 자겠다고 하였다. 이를 닦고 나와 최선생과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우리는 보리차를 마시며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와 영화 사이 광고는 길고 나는 저 감독의 다른 영화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하며 영화 줄거리를 설명하려 하였지만 이미 본 영화의 내용을 정확히 설명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나는 그 때 알게 되었다. 내가 설명을 시작한 영화는 자주 막히고 이야기는 뜸을 들이고 주인공들은 무엇을 할지 몰라 멈췄다가 어색하게 움직였다가 그런 식으로 덜컹거렸다. 이야기를 얼버무리다 영화는 다시 시작하였고 나는 다음 광고쯤 잠이 들었다.
(42페이지, 박솔뫼, 「매일 산책 연습」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열에서 낙오한 흰 고니가
부산야생동물치료센터에 왔다
얼굴에 흰 천을 씌우고
상한 날개를 잘라야 했다
날개를 자르자 흰 고니는 더 이상 먹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눈을 가리고 주둥이를 묶고
그 사이로 미음을 집어넣었다
(80페이지, 김혜순, 「고니」 가운데)

SNS에서 맛집 알파고 얘기가 퍼진 건 지난여름부터였다. 맛집 알파고의 활동을 요약하면 이렇다. 사람들이 트위터 멘션이나 댓글로 음식 사진을 보내면 상호를 맞힌다. 물론 보낸 사람은 사진에 대한 힌트를 전혀 주지 않는다. 예를 들면 다를 것 없는 떡볶이 떡과 다를 것 없는 어묵, 평범하기 그지없는 고추장 양념의 색과 그릇을 보고도 M대학 인근의 엄마손 떡볶이입니다, 하고 답하는 것이다. 정확도는 놀랍게도 99.9퍼센트였다.
(102페이지, 김금희, 「크리스마스에는」 가운데)

부산 남포동 미도리마치¹에 내 친구들이 있다고 알려준 이는, 싱가포르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사귄 여자애다. 그녀는 보름 전 불쑥 날 찾아왔다. “9년 만에 고향집에 갔는데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날 못 알아보더라. 동생들은 쫄쫄 굶고 있고.” 그녀는 양산² 내 고향집 마루에 드러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는 똥지게를 지고 마늘밭에 거름을 주러 갔다. 그녀는 내 친구들이 미도리마치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미도리마치, 미도리, 미도리…… 미도리는 초록이다. 위안소에 미도리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애가 있어서 나는 그 뜻을 알고 있다.
(170페이지, 김숨, 「초록은 슬프다」 가운데)

철판을 때리는 망치질 소리에 수레는 눈을 떴다.
새벽 두시였다. 깡깡! 깡깡! 리듬을 타는 힘차고 규칙적인 망치질 소리. 선박 수리 조선소에서 새벽 교대조로 일하는 깡깡이 아줌마들의 첫 망치질 소리일 것이다. ‘제발 잠 좀 자자. 뭘 얼마나 잘 살겠다고 꼭두새벽부터 망치질이냐’, 베개 속으로 더 깊이 머리를 파묻으며 수레가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잠은 이미 깨버렸다. 몇 시간이나 잠들었던 것일까. 한 시간? 두 시간? 요즘엔 엉망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엎어져도 좀처럼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른 봄, 호수 수면에 남은 마지막 살얼음판처럼 잠은 너무나 얇고 아슬아슬해서 작은 진동이나 소음에도 쉽게 깨져버린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수레는 생각했다. 베트콩들이 밤새도록 포탄을 쏘아대던 밀림에서도 잘 잤고, 극성맞은 거머리와 모기떼가 들끓는 진흙탕 참호 속에서도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잘 잤었다. 10미터짜리 파도가 연신 덮쳐대던 태평양의 그 작은 원양어선 기관실 위에서도 늙은 고양이처럼 잠만 잘 잤었다. 그런데 이 푹신한 침대 위에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잠을 더 자야 했다. 새벽에 아치섬에서 중요한 거래가 있었다. 그리고 그 거래가 끝나기 전에 누군가 죽을 것이다.
(202페이지, 김언수, 「물개여관」 가운데)

그해 K시를 연고지로 둔 야구팀의 성적은 예상 밖이었다. 원년 멤버인 야구팀은 오랜 부진을 겪고 있었고 그해 역시 마찬가지로 비관적인 성적이 예상되었다. 이미 전성기를 지난 팀이라는 것이 공통된 견해였다. 선수들 평균 연령이 높았고, 투수진은 나이가 더 많았고 부진한 실적에 비례해 구단의 투자는 갈수록 줄었다. 하지만 그해 봄 연승을 거두었다. 공공연하게 놀림을 받던 지난해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서른넷에 복부 비만이 뚜렷해진 7번 타자가 홈런을 쳤을 때, 동네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그 함성에 김무진의 울음소리가 묻혔다.
(264페이지, 편혜영, 「냉장고」 가운데)

1950년, 대한민국에는 부산과 인근 지역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오래된 국제 항구에서 자본주의를 쥐어짜 내는 건 불가능했다. 부산 최전선 사수 후 도착한 유엔군의 도움으로 서울까지 다시 밀고 올라가 나라를 도로 세울 수 있었다. 몇 해 동안 부산은 미국의 직접적인 통치 하에 놓였다. 바둑, 골프, 낚시를 빼고 가장 큰 인기를 누리는 야구를 제외하고는 부산중부경찰서만큼 도드라진 미국의 잔재를 찾기 어려웠다. 부산국제영화제조차 유럽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308페이지, 마크 폰 슐레겔, 「분홍빛 부산」 가운데)

저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무궁무진합니다. 건물 외부에 매달려 마치 벌떼처럼 웅웅 거리는 에어컨 실외기. 아주머니들이 모여 수다를 는 빵집 구석의 UV벌레 퇴치기. 노래 〈작은 것들의 위한 시〉가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카메라에 포착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휴대전화 스크린. 빨강, 파랑, 초록의 미세한 다이오드. 샤부샤부 식당 식탁의 내장형 전열기. 관절염에 걸린 할머니가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전기장판. 빨간불이 켜질 때까지 카운트다운하는 교통신호. 음료나 음식이 준비되면 진동과 함께 삐 소리를 내는 동그란 진동벨. 지하상가에서 지친 이들의 종아리를 풀어주는 기계 (제가 없다면 지하상가는 어두운 터널 형태의 화장실에 불과하겠죠.). 휘어진 네온사인과 LED. 자갈치 시장 앞에서 깜박거리는 물고기 떼. BNK부산은행 아트시네마의 주황색 불빛. 매해 12월, 광복로 차 없는 거리를 수놓는 크리스마스 장식과 나무들 사이에서 빛나는 순록. 그리고 상점 창문에 움직이는 글자와 춤추는 전화번호를 표시하는 것도 저예요.
(334페이지, 아말리에 스미스, 「전기가 말하다」 가운데)

떠나기 전, 유리는 나에게 일기장을 갖고 다니라고 했다. 적어도 자기 자신은 찾을 수 있겠죠. 부산항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벌써 일 년이 지났다. 그동안 일기장 따위는 갖고 다닌 기억이 없다. 일기란 가장 일그러진 형태의 노출증이라고 생각한다. 일기를 쓰는 행위에는, 그 내용이 아무리 비밀일지라도, 누군가 읽을 것이라는 희망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그칠 줄 모르고 자신을 향해 내뱉는 소리나 혼잣말과는 다르다. 일기는 불완전한 상태의 자아가 그 순간에만 드러내는 최대치의 진실을 보여줄 뿐이다. 마치 사무실 창 너머로 보이는 저 바닷물처럼 인간이란 겉으로는 조용해 보이지만, 그 밑을 들여다보면 시시때때로 변화를 멈추지 않는다.
(360페이지, 안드레스 솔라노, 「호수에 던져진 돌이 되리라」 가운데)

여기에 왜 오셨죠. 도착해보니 여기였어요. 여관 앞 골목에 들어서면 맞은편에서 출근 중인 여성들이 걸어오고 긴 다리 교차해 걸으며 도넛 박스에서 도넛 꺼내먹는 그녀들과 서로 길을 비켜주고 가끔은 농담을 나누고 가끔은 말없이 서로의 표정에 패인 구덩이의 깊이만큼 고개 숙여 지나가고 가끔은 단속반이 비자 없는 사람들을 끄집어내고 있었고 그런 날에는 길을 되돌아가 별 볼일 없어 보이는 타워를 중심으로 이리저리 구부러진 공원을 몇 바퀴 돌았다. 오르막길을 오르고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언덕의 갈림길이 많은 공원에서 몇 번은 뒤를 돌아보면서 빙글빙글 걸어온 길 위로 자기 자신이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을 향해 지금의 자신과 똑같은 옷차림으로 걸어오고 있는 꿈에서 깨어나면 사람들이 사라진 옆방에서 오늘은 쫓겨나지 않은 이들이 수치심을 지워내려 안간힘 다해 코를 골아대고 있었고 책상에 앉아 있던 티엔은 두 이모들이 가르쳐 준대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406페이지, 이상우, 「배와 버스가 지나가고」 가운데)